작은 도시의 큰 발견
2001년, 저는 이탈리아 모데나(Modena)라는 작은 도시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작은 도시‘라는 표현으로는 그 규모가 잘 전달되지 않을 것 같습니다. 서울, 도쿄, 뉴욕 같은 대도시에 익숙한 사람들에게 모데나의 크기를 설명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한국의 기준으로 보면 ‘도시‘라기보다는 서울 ○○구 ○○동, 즉 ‘동‘ 정도의 규모입니다. 시내 끝에서 끝까지 빠르게 걸어서 15분, 천천히 구경하며 걸어도 30분이면 충분합니다.
하지만 이 작은 도시는 세계적으로 유명합니다. 발사믹 식초(Aceto Balsamico)의 본고장이자, 모르타델라(Mortadella) 햄으로 유명하고, 성악가 루치아노 파바로티(Luciano Pavarotti)의 고향이며, 페라리(Ferrari)의 도시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진정한 미식의 도시입니다.
간판 없는 점심 식사
일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미식가이자 와인 애호가인 회사 대표님께서 점심에 초대해 주셨습니다. 당연히 사무실 근처 맛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테이블이 네 개 남짓, 서빙하는 직원 한 명, 메뉴판은 없습니다. 직원이 그날의 메뉴를 설명하고, 그렇게 나온 음식들은 정말 훌륭했습니다. 와인 한 잔과 함께 여유롭게 식사를 마치고,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일에 집중했습니다. 예약도 하지 않았고, 일주일에 3-4일만 셰프 사정에 따라 여는 곳이었습니다. 사무실에서 걸어서 5분도 안 되는 거리, 그저 동네 맛집이었습니다.
“그라치에(Grazie)!”를 외치고 나온 그 간판도 없던 식당이 “오스테리아 프란체스카나(Osteria Francescana)”였습니다. 셰프 마시모 보투라(Massimo Bottura)가 운영하는, 나중에 알게 된 미슐랭 3스타 레스토랑이었습니다.
그것이 제가 처음으로 경험한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이었습니다. 그렇게 저는 훌륭한 음식을 맛보는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고, 이후 기회가 될 때마다 세계 여러 곳의 훌륭한 음식들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모데나에는 오스테리아 프란체스카나 외에도 알 가토 베르데(Al Gatto Verde), 호스테리아 쥬스티(Hosteria Giusti) 등 여러 미슐랭 스타 레스토랑들이 있습니다. 이렇게 작은 도시에 이토록 다양한 스타 레스토랑이 존재하는 곳, 그것이 모데나입니다.

아버지의 손맛
아버지는 미식가였습니다.
혼자서도 뚝딱뚝딱 냉장고 재료로 정체 모를 찌개나 국을 끓이셨는데, 정말 맛있었습니다. 가락시장에서 생오징어를 사오는 날에는 순식간에 바삭한 오징어 튀김을 한 소쿠리 만드셨습니다. 튀김옷을 적절히 묻혀 바삭하게 튀기시는 솜씨가 뛰어났습니다. 노릇노릇 바삭한 겉면을 깨물면 부드러운 오징어 살이 입안 가득 퍼졌습니다. 제가 먹어본 가장 맛있는 오징어 튀김입니다.
아버지의 손맛이 그립습니다.
그런 아버지가 암으로 식사를 하지 못하게 되었을 때, 저의 하루는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로 시작되었습니다. “오늘은 뭐 먹고 싶어?” 메뉴가 결정되면 그것을 제일 잘하는 음식점을 검색하는 것이 일과가 되었습니다.
입맛을 잃은 사람을 위해 어떻게든 식사를 할 수 있게 도와드리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그때 알게 되었습니다.
“냉면이 먹고 싶다.”
미식가이신 아버지의 입맛을 돌아오게 할 평양 냉면 맛집을 찾아내는 것은 정말 어려웠습니다. 서관면옥, 설눈, 진미평양냉면… 한동안 매일매일의 메뉴는 평양 냉면이었습니다. 한 번만이라도 맛있게 드시는 모습을 다시 보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잃어버린 식욕은 다시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나날이 여위시는 모습이 지금도 생생한 그림으로 남아있습니다.

〈함께 공감하지 못한 맛의 기억〉 에서 영감을 받아 만들어본 평양냉면 이미지. 아버지가 생전에 드시고 싶어하던 평양냉면을, 그분이 좋아했을 법한 방식으로 다시 만들어본 한 그릇입니다. 찬 육수 속에 비친 빛은, 함께하지 못한 식탁의 온기이자 지금은 마음으로만 이어지는 대화의 흔적입니다. 이 한 그릇의 냉면은 단순한 음식이 아니라, 기억의 미슐랭 버전이자, 부재를 채우는 공감의 형상입니다.
나누지 못한 경험들
지금 넷플릭스의 흑백요리사 이후 요리 프로그램들을 보면서, 세계 곳곳에서 활약하는 한국인 셰프들의 이야기를 접하게 됩니다. K-Pop, K-Drama에 이어 이제는 K-Food, K-셰프까지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습니다.
올해 설 특집으로 방영된 ‘김영철이 간다‘에서 샌프란시스코의 황정인 셰프 이야기를 봤습니다. 특히 셰프의 어머니가 직접 준비하신 미역국에 치즈를 올린 ‘치즈 미역국‘이 인상 깊었습니다. 전통과 혁신이 만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 장면들을 볼 때마다 생각합니다.
만약 제가 경험했던 그 모든 맛들을, 모데나의 그 작은 식당에서의 점심을, 세계 곳곳에서 만난 훌륭한 음식들을 아버지와 함께 나눌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미식가이셨던 아버지와 그 경험을 공유할 수 있었다면, 그 순간의 기쁨을 함께 느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혹시 모데나의 그 특별한 맛을 아버지께 드릴 수 있었다면, 잃어버린 입맛이 돌아올 수 있었을까?

혼자만의 기억
결국 우리는 모든 경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나눌 수 없습니다. 시간은 기다려주지 않고, 기회는 늘 그 순간에만 존재합니다.
저는 훌륭한 맛의 기억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들은 혼자만의 기억입니다. 아버지와 공감하지 못한 경험들입니다. 함께 “맛있다“고 말하며 웃을 수 없었던 순간들입니다.
지금 당신 곁에 소중한 사람이 있다면, 오늘 함께 맛있는 식사를 하세요. 그 순간을 함께 공유하세요. 맛에 대한 공감, 그 작은 행복을 함께 나누세요.
나중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 ‘나중‘이 영영 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저는 이제 알고 있습니다.
오늘도 가볍게, 그러나 깊게. 그리고 항상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