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순화의 함정
비전문가의 눈에는 이 모든 과정이 마치 단순하고 가벼워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남의 일을 쉽게 평가하지만, 정작 그 일의 내부에 들어가 본 적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어쩌면 인간의 자연스러운 습성일지도 모릅니다. 내가 겪어보지 않은 세계는 언제나 단순화되기 마련이니까요. 복잡한 과정은 보이지 않고, 최종 결과물만 눈에 들어오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단순화가 때로는 상대방의 노고와 전문성을 지워버린다는 데 있습니다. “이 정도면 나도 할 수 있겠다“라는 말 속에는, 상대가 들인 수많은 시간과 노력이 빠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 말은 전문가가 지닌 자부심을 무너뜨리기도 합니다.
K-Culture 속에서 빠진 한 조각
K-Pop, K-Drama, K-Food, K-Culture… 지금은 한국의 위상이 그 어느 때보다 높게 평가되고, 전 세계적으로 각광받는 황금 시기입니다.
그런데, 왜 K-Fashion은 여전히 미미한 것일까요?
가끔 이런 K열풍에 묻어가려는 기사나 홍보를 접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글로벌 패션 비즈니스에 각인된 K-패션 브랜드 이름은 바로 떠오르지 않습니다. 삼성 갤럭시? 젠틀 몬스터? 아마도 가장 널리 알려진 한국 토종 브랜드이지만, 정확히 말하자면 여전히 패션 브랜드는 아닙니다.
저는 80년대를 시작으로 전 세계 패션 브랜드 시장을 눈여겨 보아온 세대입니다. 가까운 이웃나라 일본은 오래 전부터 글로벌 패션산업에 이름을 올리고 그 명성을 지금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크지는 않지만 글로벌 패션산업의 중심에 늘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성공의 공식을 찾아서
왜 한국 패션 브랜드가 글로벌 성공을 이루지 못하는지에 대해 항상 생각합니다. 제가 속한 업종이다 보니,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국 브랜드가 탄생되길 간절히 바라기 때문입니다.
데렐쿠니(Derercuny), 그 야심찬 도전
글로벌 삼성그룹의 삼성물산 제일모직은 2003년 이탈리아 밀라노에 법인을 설립하여 글로벌 마케팅 진출 및 현지 생산 등 다양한 신규 사업을 추진했습니다. 디자이너 이정민을 영입하여 2004년 9월 ‘데렐쿠니(Derercuny)’라는 여성복 브랜드를 런칭하고 밀라노 패션쇼에 선보였습니다. 최고급 소재와 우아한 디자인을 내세워 유럽 패션 매체의 관심을 받았습니다. (관련기사: 제일모직 브랜드 ‘데렐쿠니‘ 이탈리아서 돌풍)
당시 저는 이탈리아에 거주 중이었습니다. 삼성이라는 거대 기업이 한국 패션 브랜드를 만들기 위한 기획과 투자에 큰 박수를 보내며, 진심으로 성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관심 있게 지켜봤습니다.
제일모직은 약 8년간 브랜드를 위해 재정 지원을 지속하며, 2012년경 손익분기점을 넘길 목표로 했으나 지속적인 수익화에는 어려움이 있었습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제일모직은 무려 2,200만 달러라는 엄청난 투자를 감행했습니다. 명품 시장 특성상 초기 투자 비용과 브랜드 인지도 구축에 오랜 기간과 막대한 자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간과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무엇이 문제였을까
과연 무엇에 문제가 있었던 걸까요? 직접적인 원인을 확인할 수는 없지만, 제 나름의 분석을 해본다면 글로벌 럭셔리 브랜드와의 경쟁에서 확고한 차별점과 인지도 확보의 한계, 그리고 현지 브랜드와의 문화적 차이 극복이 과제였을 것입니다. 또한 당시는 K-Culture의 성숙도가 미미한 때로, 글로벌 패션 브랜드가 가져야 할 상품성과 공감성이 부족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패션 브랜드는 디자이너의 의도와 감각이 매우 중요합니다. 당시 한국의 패션 브랜드 문화는 디자이너 중심이었고, ‘디자이너가 곧 브랜드‘라는 인식이 매우 강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패션 브랜드가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어내는 가장 원초적이고 현실적인 비즈니스라고 생각해왔습니다.
디자이너로서 전 세계 많은 사람들로부터 공감을 얻어내지 못한다면, 글로벌 패션 브랜드로서의 가치는 미미할 것입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디자이너처럼 그 디자이너의 스타일을 추종하는 팬덤이 없다면 패션 브랜드로서의 가치는 제한적입니다. 따라서 한국과 같이 글로벌 셀러브리티 디자이너가 부족한 상황이라면, 브랜드명부터 제품, 마케팅까지 더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킬 브랜드를 만드는 것이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이라면 다를 것이다?
만약 그 시절 제일모직이 겪은 시행착오를 바탕으로, 다른 세계관을 가진 디자이너를 영입하여 글로벌 시장에 한 획을 그을 브랜드에 투자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저는 확신합니다. K-패션을 대표하고 글로벌 패션 시장에 이름을 확실히 각인 시킬 브랜드가 만들어질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탈리아나 프랑스는 어떻게 수많은 일류 브랜드를 만들 수 있을까요? 그 비결이 무엇인지 연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유명 브랜드들의 성공 스토리들을 찾아보게 되었습니다.

푸른 외벽은 한국 브랜드가 세계 무대 앞에서 느끼는 거리감을, 그 안의 붉은 빛은 창의성과 열정을 상징합니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이어진 공간은 현실과 이상, 장인정신과 상업성, 그리고 국내와 글로벌 사이의 흐릿한 경계를 표현합니다. 이곳은 단순한 매장이 아니라, 한국 패션이 세계에 이름을 새기는 ‘문턱’입니다.
디자이너를 존중하는 철학
LVMH의 CEO 베르나르드 아르노(Bernard Arnault)의 인터뷰 기사가 떠오릅니다. 어떻게 모든 브랜드를 성공시키는지에 대한 질문이었습니다.
베르나르드 아르노 (Bernard Arnault)가 디자이너들을 존중하고 그들의 창의성을 얼마나 중시하는지는 다양한 기사와 인터뷰에서 강조되어 왔습니다. 그는 LVMH 그룹의 모든 브랜드에서 디자이너의 자율성을 보장하며, 혁신적이고 예술적인 비전을 실현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데 집중해왔습니다.
“우리의 비즈니스는 아티스트와 디자이너들에게 제한 없는 자유를 제공하는 것에 기반한다“고 그는 밝힌 바 있습니다. LVMH는 각 브랜드를 매우 독립적으로 운영하며,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에게 브랜드 정체성과 시장 변화를 조화롭게 끌어낼 권한을 부여합니다.
그는 만약 경영진이 디자이너의 어깨 너머로 상시 감시한다면 탁월한 창작이 결코 나오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창의적 리더는 그들 스스로 아이디어를 실현할 수 있도록 배려해야 한다는 관점입니다.
실제로 디올(Dior), 루이 비통(Louis Vuitton) 등에서 보여준 혁신적이고 논란의 여지가 있는 컬렉션도 적극 수용하며, “창의적인 혼돈“을 감내하는 경영 방식을 실천해 왔습니다. 존 갈리아노 (John Galliano)가 신문지로 만든 드레스를 디올 런웨이에 올렸을 때 이를 막지 않았던 것이 아르노의 선택이었습니다.
완벽한 분업의 힘
프라다 (Prada)는 어떨까요? 프라다 브랜드를 성공시킨 미우치아 프라다 (Miuccia Prada)와 남편 파트리치오 베르텔리 (Patrizio Bertelli)의 관계는 ‘디자인과 경영의 완벽한 분업 체제‘로 알려져 있습니다.
미우치아 프라다는 1978년 가족 사업 프라다를 이어받았고, 같은 해 가죽 사업을 하던 파트리치오 베르텔리와 사업 파트너로 만나게 됩니다. 베르텔리는 미우치아에게 “디자인에만 전념하라. 비즈니스는 내가 맡겠다“는 설득을 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후 베르텔리는 탁월한 비즈니스 감각과 경영 능력을 바탕으로 프라다의 CEO가 되고, 미우치아는 디자인 개발과 크리에이티브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프라다의 유명한 나일론(포코노 Pocono) 컬렉션이 1980년대 초에 처음 선보인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알지 못할지도 모릅니다. 사치와 고급스러움이 곧 가죽 소재와 연결되던 시대에, 프라다는 산업용 천이었던 나일론으로 실용성과 현대적 감각을 동시에 내세우며 ‘호사=가죽‘이라는 패러다임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출시 초기에는 의심과 냉대도 있었으나, 미우치아는 흔들림 없이 꾸준히 나일론 제품을 출시했습니다. 한 세대를 거치며 드디어 큰 호응을 얻게 되었고, 지금의 프라다를 만든 ‘실용적 럭셔리‘의 상징이 된 아이코닉 제품이 되었습니다. 이 안에는 미우치아의 디자이너로서의 고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성공 브랜드들의 공통된 비밀
LVMH와 Prada, 두 가지 사례를 들었지만, 사실 우리가 아는 성공한 유명브랜드들은 비슷한 스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계의 명확함이 만드는 마법
크리에이티브 파트를 담당하는 디자이너와 비즈니스를 담당하는 CEO, 두 역할의 경계를 분명히 했다는 점이 핵심입니다. 하지만 이는 단순한 업무 분장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정한 의미는 서로의 전문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문화에 있습니다. 디자이너는 창작자로서의 자율성을 보장받고, 경영진은 그 창작물을 세상에 알리는 최적의 방법을 찾아냅니다. 어느 한쪽이 다른 쪽의 영역을 침범하거나 폄하하지 않습니다.
신뢰가 만들어내는 혁신
베르나르드 아르노가 갈리아노의 신문지 드레스를 막지 않았던 것, 베르텔리가 미우치아의 나일론 실험을 끝까지 지지했던 것. 이런 순간들에서 우리는 중요한 진실을 발견합니다.
혁신은 안전지대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때로는 실패할 수도 있고, 시장의 냉소적 반응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위험을 감수할 때만 진정한 창작이 가능해집니다. 그리고 그 위험을 함께 감당하려는 동반자가 있을 때, 창작자는 비로소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습니다.
한국적 현실, 그 아이러니한 간극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요? K-Pop이 빌보드를 석권하고, K-Drama가 넷플릭스 차트를 장악하며, K-Food가 전 세계 식탁을 바꾸고 있는 지금, 정작 패션 분야에서만 유독 글로벌 브랜드가 나오지 않는 이유를 우리는 어디서 찾아야 할까요?
답은 바로 전문성에 대한 인식 차이에 있다고 봅니다. K-Pop과 K-Drama는 이미 창작자의 자율성과 전문성을 인정받는 시스템이 어느 정도 구축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패션 분야에서는 여전히 “이렇게 하면 더 잘 팔릴 텐데”, “시장에서는 이런 게 인기인데”라는 말들이 창작자의 어깨를 짓누르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전문성의 경계를 흐리는 것은 결국 모든 분야의 발전을 저해합니다. 창작자에게는 창작의 자유를, 경영자에게는 경영의 전문성을 인정할 때, 비로소 세계적인 브랜드가 탄생할 수 있습니다.
결국 성공하는 브랜드들의 비밀은 간단합니다. 서로 다른 전문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문화, 그리고 그 문화 속에서 피어나는 신뢰와 혁신, 이것이야말로 전 세계가 인정하는 브랜드를 만드는 진정한 공식인 것입니다.
오늘도 가볍게, 그러나 깊게. 그리고 서로의 경계를 존중하며.